해방의 감격과 함께 찾아온 분단은 우리 교육사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미군정에 의해 수립된 근대적인 의미의 교육제도와 사상은 후일 현대 한국 교육의 원형으로 자리잡을 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나 명령을 받은 한 미군 대위가 문교부의 전신인 학무국을 접수하면서 시작됐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미 군정청은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일본의 아베 총독으로부터 항복문서 조인을 받고, 9월 11일 일장기를 내리면서 시작했다. 군정장관에 임명된 아놀드(A. B. Annold) 소장은 아베 총독을 해임하는 일로 업무를 시작했으나 일부 일본인 관리들은 여전히 존속시킨 채 부처별로 미군 담당관을 임명, 본격적인 군정업무에 착수했다.
이 시기의 주된 교육 방향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주의를 확립하며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반공 보루로서의 민주 시민 양성에 초점이 두어졌으나 한국 교육제도나 여건을 연구했던 미군 장교가 전무하고 사전 정보나 준비가 미흡했던 관계로 뼈대를 잡아나가는 일은 이후로도 상당기간 지연됐다.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이 “2차대전 전, 한국에 대해 아시아의 동쪽 먼 끝에 위치한 이상한 나라라는 정도 이상의 지식이나 관심을 가졌던 미국인은 거의 없었다”며 “극소수의 선교사를 제외하고는 1945년 미국이 한국에 상륙할 때까지 미국인들에게는 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알 수 있는 기회는 드물었다”고 후일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힌 것도 이런 사정을 뒷받침한다.
미 군정청 학무국의 공식 업무는 9월 11일 교육담당관에 임명된 락카드(E. L. Lockard) 대위가 공보관계 일을 맡는 5~6명의 사관과 중앙청 2층 동편 한 방에 입주하면서 시작됐다.
시골 초등교사 경험이 발탁 배경락카드 대위가 학무국장에 발탁된 배경은 그가

고향인 미국 캔터키주의 한 시골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1년 남짓 한 경험이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발족 당시 학무국은 락카드 국장 아래 국장실과 학무과, 청년수련과, 종교과, 사회사업과, 사학과, 기상과 등 1실 6과로 편성됐으나 10~12월에 걸친 3차례의 조직 개편 끝에 1국장, 1부국장, 2보좌관, 9과, 13계로 확대됐다.
락카드 대위는 그러나 한국교육에 대해 소양과 식견이 부족하고 유능한 한국 교육자를 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일제 조선총독부의 마지막 학무국장이던 엄상섭의 자문을 받아 한국 교육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오천석이나 백낙준, 유억겸, 김성수 등 당시 교육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미국 유학파들이 해방 공간에서 교육계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 원인과 배경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았다.
■ 한국교육위원회(The Korean Committe on Education)1945년 9월 12일 락카드의 요청으로 참여하게 된 오천석의 1차 임무는 미 군정 학무국과 당시 한국의 교육지도자들과의 회담을 주선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락카드는 9월 16일 오천석 등의 추천으로 만난 교육계 인사들 가운데 1차로 16명을 다시 불러, 그들로 하여금 자문기관을 구성하기 위해 교육계를 대표할 전문가를 투표로 선출할 것을 제의했다.
그 결과 초등교육부문에 김성달을 비롯, 중등교육 현상윤, 전문교육 유억겸, 고등교육 김성수 등이 뽑혔으며, 교육전반에 백낙준, 여자교육에 김활란, 일반교육에 최규동 등 모두 7명이 선출되고 이들이 바로 한국교육위원회를 결성하는 핵심 맴버가 되었다.
그후 9월 22일에는 김성수가 교육담당관의 고문이 되고 군정장관의 추천으로 그 자리에 백남훈이 위원으로 취임하였으며 11월에는 의학교육에 윤일선, 농업교육에 조백현, 학계 대표에 정인보 등이 참가하여 10인 위원회가 구성됐다.
한국교육위원회의 공식 성격은 자문기관에 불과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교육 전반에 걸쳐 중요한 모든 문제를 심의·결정하였고 각 도 교육책임자 및 기관장과 같은 주요 인사문제를 다루면서 정치적 기반을 갖춘 교육 핵심 세력으로 급격히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