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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시작된 6월 항쟁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은 학생운동사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주의 정착에 커다란 획을 긋는 사건이다.

87년 서울대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과 연세대 이한열 군의 죽음은 우리나라 민주화의 길을 재촉한 사건이었다. 박종철 군의 죽음은 사건 하루 뒷날인 87년 1월 15일 세상에 알려졌으며 경찰은 사건발생 30여 시간 만에 사건을 공식발표했다.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박군의 사망경위가 심장마비인 것처럼 말했고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고 설명했다. 이 말은 두고두고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종철과 이한열 군의 죽음

박군 고문 치사사건은 고문 등 수사기관의 인권 유린 행위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크게 고조시켰다. 각계에서 고문 공청회가 열리고 고문 근절 성명서가 발표됐다. 당국에서도 고문 근절 대책을 잇따라 내놓았다. 정호용 내무부장관은 경찰서마다 ‘고문신고센터’를 설치하겠다고 밝혔고 이영창 치안본부장은 영장 없는 연행과 지하실 조사, 심야조사 등을 금지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몇 개월 후 이 사건이 조직적으로 축소은폐 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무총리, 안기부장, 내무부장관, 법무부장관, 검찰총장이 전격 경질되는 등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같은 해 6월 9일 전경의 직격탄을 맞고 쓰러진 연세대 이한열 군 사건은 6월 민주화운동의 결정적인 기폭제가 되었다.

이군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각 대학 학생들은 물론 연세대·서강대·숙명여대 등 대학 교수의 최루탄 사용금지 성명이 발표됐으며, 각계에서는 이한열 사건의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다. 경찰은 서울 서대문경찰서장을 직위 해제했다. 그러나 사건 27일 만인 7월 5일 이한열 군은 숨을 거두었다.

박종철과 이한열 군의 죽음은 80년대 중반 극렬했던 학원사태와 초강경 대응으로 맞선 정부와 경찰이 빚어낸 시대적 비극의 산물이었다.

두 사건에 앞서 86년 일어난 서울대 권인숙 양 성고문사건도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며 국민의 분노를 자아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군사정권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게 된다.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이 거세지면서 80년대 중반 들어 그동안 상아탑 속에서 안주하던 교수들이 시국선언 등을 통해 침묵을 깨고 민주화에 동참하기에 이른다. 86년 3월 28일 발표된 고려대 28명의 시국선언문을 신호탄으로 한신대·서울대 등 35개 대학 9백여 명이 시국선언에 동참했으며 이는 종교계·언론계·재야단체 등의 시국선언으로 이어져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교수들의 잇따른 시국선언

87년에는 4·13호헌조치를 비난하는 서울대 교수 1백22명의 시국선언을 비롯, 각계의 시국선언과 서명운동이 4∼5월 내내 이어졌다. 같은 해 대통령후보 지명을 위한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6월 10일, 전국 대학생들과 재야단체로 구성된 국민운동본부는 ‘호헌철폐와 독재종식을 위한 범국민 궐기대회’를 전국 22개 지역에서 열었으며 이한열 군을 죽음으로 내몬 최루가스 추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6월 민주화운동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정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4·13호헌 조치와 이한열 군의 죽음 등 사건들이 맞물리면서 전 국민적인 민주화운동으로 발전되었다. 6월 한 달 동안 전국 동시다발적 시위로 5공 정권은 위수령 선포도 고려하지만 결국 민주화 세력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통령 직선제 등을 내용으로 하는 ‘6·29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입력 : 20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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