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종합대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각 학교의 기존 건물과 설비를 최대한도로 활용하고 유능한 교수의 상호 교류와 교수의 연구 시간을 많이 갖게 하며, 국가의 재정 절약과 다른 학교의 장점을 누구나 받을 수 있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
1946년 7월 13일 문교부 기자실.
유억겸 문교부장은 예정에 없는 출현에 의아해하는 기자들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대동한 오천석 차장의 설명으로, 국립 서울종합대학교 설립안(이하 국대안)을 전격 발표했다.
이날 문교부가 밝힌 국대안의 주요 내용은 기존의 경성대학과 서울 근교에 위치한 관립전문학교 등 9개 전문학교를 폐지, 하나의 종합대학으로 개편해 9월 신학기부터 시행한다는 것으로, 대학의 자주성과 학문 자유 보장을 위해 최고 정책결정기관인 민선 이사회를 별도로 두는 것 등을 명시했다. 다만 민선 이사회가 조직될 때까지 잠정 조치로 미군과 문교부로 구성된 임시이사회를 둔다는 것이었다.
경성대학 등 10개 학교 통폐합통합대상이 된 학교는 당시의 경성대학(법문학부, 이공학부, 의학부)과 경성의학전문, 경성치과전문, 경성법학전문, 경성광산전문, 경성고등공업학교, 경성고등상업학교, 경성사범학교, 경성여자사범학교, 수원농림전문 등 총 10개에 달했다.
이밖에 예술대학을 신설하며, 이를 9개 단과대학과 1개 대학원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9개 단과대학은 문리과대학(경성대학 문학부, 이학부), 법과대학(경성대학 법학부, 법학전문학교), 사범대학, 의과대학(경성대학 의학부, 의학전문학교), 상과대학, 공과대학, 치과대학, 농과대학, 예술대학(음악부, 미술부) 등이었다.
이날 발표는 한달여가 지난 8월 22일 미 군정에 의해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군정법령 102호)으로 공포돼 법적 효력을 가지면서 오늘날의 서울대 탄생 배경이 되었다.
일반의 이해를 촉구한다는 의미에서 장문의 성명까지 덧붙인 이날 문교부 발표는 그러나 사전에 고등교육기관 재편성에 대한 어떠한 정책 구상이나 합의도 도출되지 않은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학원가에 논쟁의 불씨를 지피는 도화선이 되었다.
특히 국대안은 미 군정기 대학사에 있어 광범위한 저항과 유혈 사태까지 야기하는 첫 사건으로 기록되면서 해방 후 역동적으로 재편되는 정치상황과 맞물려 급기야는 이념 갈등과 친일파 배척, 학원 민주화 등을 주요 쟁점으로 하는 교육 주체간 본격적인 세 대결 양상으로 확대됐다.
거센 저항 부른 국대안 파동국대안 발표로 촉발된 논란은 경성공업전문학교 재경 학생의 반대 결의(7.21)를 시작으로 경성대학 의학부 학생(7.23), 경성대학 이공학부 직원회(7.29), 전문대학 교수단 연합회, 조선교육자협회(7.31) 등 대학가의 거센 반대 성명과 결의로 이어졌다.
그러나 문교부는 일부 찬성과 거센 반대에도 불구, 미군정청의 군정법령이 확정 공포되는 것을 기회로 서울대 초대 총장에 경성제대 총장 출신의 엔스테드(Harry B. Ansted) 해군 대위를 전격 임명했다.
또 교무처장에는 연희전문의 언더우드(Horace N. Underwood) 교수를 임명했으며 윤일선 경성대 의학부장을 대학원장에, 이태규 경성대 이공학부장을 문리대 학장에, 고병국 경성대 법문학부 교수를 법대학장에 각각 임명하는 등 서울대 토대를 이루게 된 대학원장과 각 단과대 학장 및 3처 1국 9과의 대학본부 체제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문교부의 이같은 정책 강행은 조선공산당과 연관된 좌익계열 교수와 학생, 그리고 일부 민족진영 교수와 학생이 가세하면서 조직적인 저항을 촉발해 전국 단위의 동맹 휴학과 교원 총 사퇴 및 이에 대응한 문교부의 휴교령 등 악순환을 몰고 왔으며 이후 1년여에 걸쳐 학원가를 극도의 혼란에 빠뜨렸다.
특히 47년 2월 국대안 시행후 두 번째 개강을 앞두고 학원가는 극심한 저항을 보여 서울대 각 단과대가 동맹휴업에 들어갔으며 연희대, 한양공대, 동국대, 국학대 등 서울 시내 주요 대학과 경기상업, 경북중, 덕수 상업, 동명고녀, 동성 중학 등 전국 57개교에서 5만여명이 동맹휴업에 가담했다.
교수들도 서울대 상대, 법대, 공대 교수단의 반대 성명과 사임 결의가 잇따랐으며 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국대안 대책협의회’도 국대안 철회 요청을 내는 등 47년 5월까지 국대안 소요로 인해 학원을 떠난 교수는 9개 대학에 걸쳐 총 3백80명에 이르렀으며, 제적된 학생도 4천9백56명에 달했다.
‘국대안’에 왜 격렬히 저항했나그런데 특기할 것은 미 군정기에 교육 주도 세력들이 ‘민족화’ 운운하면서도 유독 일제가 식민지용으로 만든 경성대학을 중심으로 국립 종합대학안을 추진해 이런 논란을 자초했느냐 하는 것이다. 민족문화적 시각이나 일제 잔재 청산의 의미에서도 정통성 회복을 위해 당시 사립대학이지만 설립을 준비하고 있던 ‘성균관’이 존재하고 있었고, 밑그림을 다시 그려야 하는 계획이었다면 오히려 경성대학보다는 이쪽이 훨씬 용이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 사사편찬위원회는 ‘서울대 50년사’에서 “이 파동의 주요쟁점은 뿌리가 다른 학교간 갈등과 미 군정 주도의 학교 운영에 대한 반발, 그리고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인 경성대학을 중심에 두는 것이 민족 정통성에 맞지 않는다”는 점 등이었다. 초대 총장에 미국인 대위 앤스테드가 취임한 것도 교수와 학생들의 반발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정태수 전 대진대 총장은 이에 대해 “사실 성균관 중심의 국립 종합 대학안이 생길 수 없었던 이유는 당시의 설립 여건보다는 미 군정의 몰이해와 문교 당국자의 인식 차이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고 증언하고 있다.
국대안 파동은 그러나 이런 문제와는 또 다른 배경도 가지고 있었다. 논란이 진행되는 1년여에 걸쳐 대부분의 학원은 좌·우익의 이념 갈등과 논쟁의 격전장으로 변했으며, 이 과정에서 교육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교육 주체간 치열한 싸음이 전개돼 결국 보수 우익 진영만이 학문의 적자로 살아남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문교부 차장으로 재직하던 오천석이 후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증언은 이같은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낸다.
“국대안의 발상은 같은 국가의 재원으로 동일한 성질의 교육을 하는 기관이 2종 3종으로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재정 절약보다 더한 것은 교수 요원의 부족이었다. 그나마 이들 교수 요원 중에는 고등교육을 이끌만한 자질이 없거나 설령 자질은 충분하더라도 좌경색이 짙은 교수들이 많아 민주교육 실현에 큰 장애가 되고 있었다. 내 마음 속으로는 무능력하거나 좌경색의 교수를 축출해 내고자 했던 의도도 다분했다. 그러나 질이 낮다거나 좌경색이 짙은 교수를 축출한다는 의도는 당시로서는 입 밖에 낼 수조차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결국 해방 1년의 갈등과 분노가 표출된 국대안 파동은 정치 경제 상황과 이념 대립의 갈등 속에서도 미 군정청의 교육 정책과 교육 주도 세력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체제유지적 보수 정치인과 지식인을 선발·육성하려는 냉전 이데올로기의 바탕 속에 추진되고 활용되었다.
후일 좌익세력을 척결하는 도구로 활용된 소련의 남로당 비밀 지령문 사건은 이런 배경 속에 촉발됐다.
■ 소련 비밀 지령문은 민족진영의 조작 문건‘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을 둘러싸고 벌어진 좌·우 이념 분쟁 속에서 소련 사주를 받은 남로당 세력이 국대안 반대를 주도했다’는 결정적 근거 자료로 활용된 ‘소련의 비밀 지령문’은 당시 대한민청 감찰부장이던 김두한 등 민족진영(우익)에서 만든 허위 문서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본지 대학비사팀이 지난 1946년부터 1년여에 걸쳐 전개된 ‘국대안 파동’을 추적, 취재하는 과정에서 처음 드러난 것으로, 특히 이 비밀 문건이 그간 학계의 학술 서적이나 논문, 그리고 당시 미 군정청이 국대안 반대 활동을 일삼은 좌익진영을 척결하는 이유로 든 1차 사료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문제의 이 문건은 소련의 교육담당 니콜라이 그즈노프 소좌가 1947년 1월 2일자로 남로당위원장 허헌 앞으로 보낸 비밀 지령문으로 ‘미·소 공위 결렬 책임과 신탁통치, 남조선 혁명의 당위성 및 종합 계획서에 입각해 국대안 반대를 위한 광범위한 동맹휴학을 시작해야 한다’는 등의 민감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문서는 특히 좌·우 대립이 극심하던 1947년 2월 13일 서울대 건설학생회 주최의 ‘동맹휴학 진상 폭로대회’에서 대한민청 감찰부장이던 김두한이 처음 폭로한 이후 정설로 받아들여져 ‘신탁통치 찬성과 국대안 반대’로 민족진영과 갈등을 보이던 당시 좌익진영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으며, 미 군정청의 좌익세력 검거 명분이 되기도 해 역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문건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본지 조사 결과 당시 상황에 정통한 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상임의장, 박갑동 전 남로당 지하당 총책 등은 이 문건이 민족진영이 만든 조작된 문서였다고 증언, 당시 좌·우익간 흑색 선전과 마타도어가 어느 정도 치열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박갑동은 지난 98년 12월 분단 후 처음 가진 이철승과의 대담에서 “지령이 내려왔다는 얘긴데…. 소련의 지령이 어찌 허헌의 집에 있을 수 있습니까? 남북의 기밀선은 박헌영에게 있었고 박헌영의 월북 후에는 남로당이 기밀 연락을 소련이나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받았던 것이 아니라 북한에 있던 박헌영이 남로당 해주 연락소에서 서울의 김삼룡에게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또 지령은 독특한 암호로 되어 있어 다른 사람들이 봐도 무엇인지 모르게 되어 있었어요.”
이철승 의장은 이와 관련, “김두한이 가져온 소련의 비밀 지령문이 가짜였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며 그러나 “이 문건이 설사 가짜문서라 하더라도 당시 국대안 반대 운동을 위해 남로당이 조직적으로 학원에 개입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