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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NL이야 PD야? 
1980년대 후반의 ‘사회구성체 논쟁’은 그 규모나 쟁점의 광범위함, 치열성에서 단지 ‘운동권’만의 논쟁이 아니라 해방 이후 지성사 가운데 전무후무한 예로 꼽힌다.

85년 ‘창작과 비평’의 박현채 씨와 이대근 교수간의 논쟁을 계기로 시작되어 그뒤 학계와 운동권에서 거의 동시에 진행되는 특이한 양상을 보였다. 이 논쟁은 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주변부자본주의론의 대립에서 한국사회 성격과 관련돼 제기될 수 있는 온갖 쟁점과 한국사회 변혁의 전략전술론 등으로 이어지면서 80년대의 변혁 에네르기가 총결집된 산물이라고 할 만큼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사회구성체 논쟁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과 변혁론 논쟁은 1980~83년의 준비기, 1984~85년의 1단계 논쟁(CNP 논쟁), 1986~87년의 2단계 논쟁(NL-CA 논쟁), 1988~90년의 3단계 논쟁(NL-PD)으로 변화, 발전된 것으로 평가된다.

81년 전학련(전국총학생회연합)이 해체된 후 다시 조직을 건설하지 못하고 투위(투쟁위원회)만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당시 정권 측과 언론에서 운동권에 대한 감시가 살벌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학련의 조직원들은 투위만 제외한 채 모두 비공개적으로 활동했다. 투쟁조직의 이름은 ‘삼민투’로서 민족·민주·민중 투쟁을 의미한다. 전학련 조직원들이 감옥에서 출소하기 시작한 85년 고려대에서 삼민투 투쟁대회가 열렸고, 이 때부터 투위의 활동은 재가동되기 시작한다. 이 당시 일본 서적을 번역한 마르크스, 레닌 원전들이 유인물 형식으로 유포되기 시작했다. 이전의 학생들은 해설서만 볼 수 있는 형편이었다. 원전의 대중화로 인해 사상 투쟁이 시작되었으며 사구체(사회구성체) 논쟁이 극렬하게 일어났다.

이후 사구체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인해 삼민투가 분열되고 민민투(민족민주투쟁위원회), 자민투(자주민족투쟁위원회)라는 두 개의 조직으로 재편성되었다. ‘제헌회의’ ― 헌법을 바꾸어야 한다는 다소 급진적인 주장을 표방하던 민민투는 CA로, ‘민족해방’을 주장하던 자민투는 NL(Nation Liberation)로 명칭을 바꾸면서 조직을 재정비해 나갔다. NL이 주류였으며 CA는 소수였다.

NL과 PD

NL은 기본 사상을 IT(Identity Theory), 즉 주사(주체사상) 및 반제반봉건주의로 정리했다. 80년대 후반에 들어 CA는 제헌회의론을 폐기하면서 ‘민족민주주의’를 제창하는 ND(Nation Democracy)로 재정리했다. 주체사상을 반대하는 NL 좌파, 그리고 CA 일부가 모여 ‘민중민주주의’ 계열의 PD(People Democracy)를 조직했다. NL은 87년 한총련의 전신인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ND는 사노맹(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라는 별도의 조직을 구성했다.

사구체(사회구성체) 논쟁은 PD의 등장과 함께 불붙기 시작했다. 기존 운동권이 한국의 상태를 ‘반(半)봉건’국가라고 설명했지만, PD는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주장했다. ‘신식국독자’란 일국의 자본이 그 나라를 완전히 점유한 후 다른 나라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식민지화하여) 이윤을 더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이론은 우리나라가 식민지 상태이면서 다른 나라를 다시 식민지로 삼을 수 있냐는 문제 제기 때문에 많은 공격을 받았다. PD는 이러한 비판에, 미국의 경제적 식민지임에도 동아시아에 경제적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는 한국의 실제적인 현상을 증거로 주장을 강화했다. 한편 ‘한국 - 봉건주의’를 외치는 NL의 의견은 지극히 북한의 이론에 편향된 것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북한은 우리나라를 봉건제 국가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북한의 평가를 그대로 남한 운동권에 전파하기에는 현실적인 문제(이미 재벌 구조가 현실화되었다든지 등등)가 있었으므로 당시 IT(NL)에서는 반(半)봉건국가(절반만 봉건제를 유지하고 있는)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입장은 다분히 정치적이라는 비판의 여지를 만들어냈다. 후에 수구·보수 세력은 이러한 명목으로 NL 성향의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93년 출범)을 이적단체, 즉 국가의 전복을 목표로 하는 단체로 규정하고, 한총련 회원들을 수배자로 만들어버렸다.

한총련의 이론적 배경

이 논쟁처럼 자기 나라의 사회 성격을 해명하기 위해 수많은 활동가, 연구자들이 그렇게 열성적으로 논의에 참여한 경험은 세계 역사에서도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든 경우였다. 그 자체의 논쟁 구도가 바뀌는 발전을 거듭했을 뿐만 아니라, 논쟁의 성격상 논쟁의 장이 거의 전 분야로 확산되면서 확대·재생산되었다. 한국사회의 총체적 성격에 대한 근원적 물음, 이론틀의 적용을 둘러싼 사회과학 방법론 논쟁과 이와 관련된 역사 법칙 논쟁, 역사적 현재의 성격 규명을 위해 불가결했던 일제시대 사회성격 논쟁의 재현과 현대사의 재해석을 둘러싼 논쟁, 상부구조의 차원으로 폭이 넓혀진 한국 국가 성격에 관한 논쟁, 그리고 한국의 계급 구성과 변혁운동의 방향 및 변혁 주체 대상을 둘러싼 논쟁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이 남긴 최대의 성과 가운데 하나로, 아마도 우리 사회에 변혁적 시각과 변혁적 이론을 재정립하고 확산시켰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전후 40여 년 동안 이 땅의 진보적 언어의 대열에서 강제적으로 배제되었던 ‘혁명적 언술’들이 역사적으로 복원되었고 사회적으로 합법화되었던 것이다. 물론 완벽하게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혁명적 주제를 혁명적 언어로 토론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논쟁을 통해서 가능했다. 진보학계의 경우 이러한 변화의 반영으로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적 패러다임이 복원되고 변혁적 관점과 정치경제적 방법론에 입각한 연구가 확산되었다. 사실, 계급적 관점의 본격적인 대두 속에서 계급이라는 단어와 민주 ‘변혁’이라는 단어가 일정한 사회과학적 시민권을 얻은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이러한 변화는 그간 우리 사회의 반쪽 불구화된 이데올로기 지형, 즉 극우 이데올로기 일변도의 지형을 고려할 때 획기적인 변화였고 패러다임의 질적 변화였다고도 할 수 있다. 
입력 : 20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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