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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행렬, 우울한 청춘 
1991년 4월26일, 명지대생 강경대 군(당시 20세, 경제1)이 교내 시위도중 이른바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6공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키우면서 공안정국으로 경색됐던 당시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바꿔 놓았다. 당시는 6공 정권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이 갈수록 도를 더하면서 국민들의 정치적 허무주의와 무기력증이 깊어가던 정치적 퇴행기였다. 완강하게 지속되는 군부독재, 그로 인한 국민들의 정치적 염증은 민주화 전망을 어둡게 했다. 그러던 중 터진 강경대 군 치사사건은 6공 정권의 폭력성과 잔악함을 다시 한번 명징하게 보여주면서 집권세력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됐다.

명지대생 강경대 군 치사 사건

강군 치사사건 다음날인 4월27일 전민련, 전대협, 전교조, 전노협 등 재야·시민단체들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전국적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 해 4월29일에는 연세대 집회를 시작으로 수만에서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시위가 잇따랐고 ‘정권 퇴진’을 촉구하는 각계각층의 성명이 연일 발표됐다.

그러나 사태는 강군의 죽음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4월29일에는 전남대생 박승희 양(당시 20세, 식품영양2)이 교내 학생회관에서 시너를 온몸에 끼얹고 “노태우정권 타도하자”는 등의 구호를 외친 뒤 분신했고, 이어 5월1일에는 안동대 김영균 군(당시 20세, 민속3)이 “살인폭력·민중탄압 즉각 중단하라”는 구호와 함께 분신, 이내 쓰러져 숨졌다. 이후에도 경원대 천세용 군(당시 20세, 전산2)이 정권 퇴진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며 역시 분신후 6m 난간 아래로 뛰어내려 유명을 달리했다. 이외에 고등학생, 노동자, 주부 등 광범위한 계층의 사람들이 군부독재에 대한 항거의 의미로 잇따라 안타까운 죽음의 행렬을 이어갔다.

강기훈 유서대필 논란

그러나 이런 와중에 일어난 김기설 씨의 분신자살과, 그가 남긴 한 장의 유서로 인해 벌어진 강기훈 씨 유서 대필 논란은 노정권에게 반전을 위한 호재로 작용했다. 자살을 ‘혁명’에 이용하기 위해 동료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이념적 반격을 시작한 노정권은 이를 빌미로 민주화운동 진영을 맹렬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70년대 대표적 저항시인이던 김지하 씨가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면서 ‘죽음을 통한 항거’라는 저항 방식을 질타하고 “최근 발생하는 죽음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선동세력이 있다”(박홍 서강대총장), “그런 죽음(강경대 군)은 더 이상 필요없다”(김동길 연세대교수) 등 일부 지식인들이 돌출적 발언을 이어가면서 ‘죽음’의 의미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에 불이 붙었다.

그러나 ‘용기있는 지식인’이라는 일각의 상찬에도 김지하 등 이들 지식인에 대해 쏟아진 비판은 더욱 매서운 것이었고 5백여명의 문인이 회원으로 있는 민족문학작가회의는 김지하를 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돌출발언이 민주화운동 진영을 탄압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이유에서 이다.

죽음을 통한 이들의 항거에는 ‘이번만은 군부독재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절박감과 함께 ‘소신공양’이라는 희생적 투지가 배어있었던 만큼 이들의 죽음은 안타깝고도 지고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에 서있는 모든 이들에게 쉽사리 결론내릴 수 없는 실존적 질문을 던진 채 아픈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입력 : 20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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