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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 종합대학 탄생 
1946년 8월 15일은 우리나라 고등교육사에 새 이정표를 세우는 날이 되었다.

일제가 패망한 지 만 1년이 되는 날 사립대 가운데는 최초로 연희와 이화, 보성전문이 각기 연희대와 이화여대, 고려대로 교명을 바꿔 나란히 종합대학으로 승격됐기 때문이다.

서울대 설립 파동으로 야기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비록 미 군정청으로부터 받은 인가였지만 이들 대학으로서는 일제시대의 왜곡된 제도와 이념을 뒤로 하고 우리의 손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열어나갈 수 있다는 감격에 새 도약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연희대 종합대학 승격

연희전문은 특히 설립 당시부터 종합대학을 염두에 두고 기구와 조직을 구성했으나 일제의 식민 정책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미 군정청이 접수 업무를 시작한 1년 뒤 대망의 종합대학교로 거듭났다.

일제 말기의 사정을 보면 우선 연세대 의대의 전신인 세브란스의전은 1942년 아사히의전으로, 연희전문과 보성전문은 1944년 각각 경성공업경영전문과 경성척식경제전문으로 교명을 박탈당했다. 특히 연희전문은 건물이 적산으로 몰수돼 공립학교화하고 일본인 교장이 학교를 관장했다. 때문에 광복이 되고도 학교를 되찾는 과정에서 미군이 일본으로부터 학교를 접수해 다시 연희의 접수위원에게 넘겨주는 절차를 밟았다.

연희대는 미 군정청에 설립 인가를 제출한 뒤 8월 6일 원한경을 비롯, 연전시대 교수로 재직하며 당시 선교사로 와 있던 베커(Becker), 빌링스(Billings), 원일한 등이 참여해 대학원(국문, 영문, 사학, 철학, 정치외교, 교육), 상학원(상학, 경제학), 이학원(수학, 물리, 화학) 신학원(신학)으로 나누는 한편 초대 총장에는 백낙준을 임명해 그해 10월 25일 개교식을 거행했다.

남녀 공학제 최초 실시

그런데 특이한 것은 해방 후 최초로 연희대에서 ‘남녀 공학제’가 실시됐다는 것이다.

지금은 남녀공학제 실시가 오히려 자연스러운 세상이 됐지만 1946년부터 연희대에 여학생 입학이 허용되면서 당시에는 이를 두고 사회의 반대 여론도 많았으며, 여학생을 위한 학교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원일한 연세대 이사는 이와관련, “당시 입학한 여학생은 10여명에 불과했지만 여학생 휴게실을 만들기 위해 동분 서주한 결과 하와이 교포들의 성금을 받아 본관 옆에 작은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며 “이 건물은 하와이 원주민의 ‘안녕’이라는 인사말을 따 ‘알로하관’이라고 명명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연희대학이 정상적인 학사 운영을 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여전히 산적했다. 일제시대부터 존재해 온 전문부 학생과 학부 학생간의 학사 처리 문제를 비롯, 시설, 설비, 교수 요원의 부족 등은 대학교육을 정상화시키는 데 장애가 됐으며 무엇보다 재정 확충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됐다.

한편 당시 연세대 명예총장이면서 미 군정청 중앙심의회 위원으로 있던 원한경의 부인이 좌익 테러로 숨지는 돌발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은 해방공간에서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이 학원가에서도 얼마나 극심하게 전개되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불행한 사건으로 기록됐다.

■ 원한경 부인 엘터 여사 피살 사건

1949년 3월 17일은 한국에 온 언더우드 가족에게 잊혀질 수 없는 비통한 날이 되었다.

이날은 마침 원한경 집에서 교수부인회 모임을 갖고, 파리의 유엔총회에 다녀온 시인 모윤숙을 초빙하여 유럽여행담 겸 간담회가 개최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괴한 5~6명이 정문과 뒷문을 열고 난입, 이중 배경환은 카빈 총탄을 원한경의 부인 엘터 여사에게 발사했다. 부인은 1916년 원한경과 결혼한 뒤 그 다음해에 내한하여 줄곧 연희를 위해 일해 왔으며 당시 61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이 시각에 학교에서는 교무위원회가 진행돼 장학금을 지급할 학생을 심사하던 중이었으나 급보를 받고 회의를 중단, 교직원과 학생들이 원한경의 집으로 달려갔다.

총상을 당한 부인은 즉시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가던 도중 운명하고 말았다. 이날 원한경은 흐느끼는 친지와 자식들을 위로하는 한편 부인의 영정 앞에서 누군가에게 보낼 편지를 쓰며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이 편지는 훗날 원한경이 범인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을 대통령에게 청원하는 글이었음이 밝혀져 다시 한번 주위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부인의 유해는 다음날 부평의 미군병원으로 옮겨졌다가 20일 집으로 운구됐다.

이 동안 학교에서는 학교장을 준비했고 문교부에서는 교육장을 요청해왔다. 그러나 학교 장의위원회가 주최가 되어 3월 22일 새문안교회에서 교직원, 동문, 정부, 국회, 교육계 인사 1천5백여명이 모인 가운데 영결식을 거행하고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안장하였다. 그 후 4월 11일에는 교내에서 다시 추도식을 가졌고 이날 연우체육회에서는 부인 묘지에 무궁화를 식수했다. 4월 30일에는 배재중학 교정에서 정부 요인과 30여 사회 교육 단체 합동으로 추도식이 열렸다

한편 공산계의 김석준, 배경환, 김동휘, 안석규, 장현수, 경문수 등은 4월 2일 체포되어 응분의 죄과를 받았다. 부인을 살해한 배경에 대해 이들은 법정에서 일제하 친일 행각을 벌이고 해방 후 우익 활동을 대변하던 시인 모윤숙을 응징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변명했으나 부인의 피살 사건은 당시 이념 대립으로 어지러웠던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사랑하는 부인을 타국에서 잃은 슬픔에 마음 아파하던 원한경은 이 사건이 일어난 지 2년 뒤인 1951년 2월 20일 피란 수도 부산 동래의 우거에서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동래 뒷산 금정산에 올라 한국의 산야를 새삼 눈여겨보고 난 다음날이었다. 
입력 : 200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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