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학신문 홈 > 뉴스 > 칼럼/이슈 홈

목록
프린트 스크랩
송백헌 칼럼
송백헌의 어원산책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송백헌 칼럼]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요년석’ - 볼모 소현세자가 청에서 가져온 ‘용연석’에서 유래
요년석은 요녀석의 변형된 말로서 ‘요+녀석’으로 분석된다. 여기서 ‘요’는 지시어인 ‘이’의 아어형(雅語形)이요, ‘녀석’은 ‘사내아이를 귀엽게 일컬을 때’ 또는 ‘어린 사내아이를 꾸짖을 때’ 쓰는 말이다. 그런데 이 ‘요년석’의 내력에 대하여 조선조의 편년사(編年史) 중의 하나인 조야첨재(朝野僉載)에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의 소현세자(昭顯世子)와 관련된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신빙성에는 다소 의문이 가지만 역사기록인 만큼 그 내력을 소개한다. 조선조 인조 14년인 1636년 12월 2일 청 태종(淸太宗)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수도 심(瀋陽)을 출발하여 조선을 침공하자, 인조는 소현세자를 비롯 미처 피난을 못하고 부득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청 태종이 16일에 남한산성을 포위, 고립 45일만에 식량이 바닥난데다 추위로 말미암아 성안의 장병들은 기력을 잃고 원군은 도중에 청군에 격파 당함으로써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왕은 처음에 항복을 주저했으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부득이 1637년 정월 30일 왕세자와 함께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檀)에서 청 태종에게 항례(降禮)를 드리니 이것이 우리나라 근세사에서 처음 겪는 치욕이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두 왕자는 인질로 청나라 당시의 수도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조선관에서 8년간이나 유폐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기록되지 않은 야사(野史)가 전한다. 청나라 황제가 8년간을 청나라에서 생활하다 돌아가는 두 왕자들을 불러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소원을 말하라하자 소현세자는 청나라 황제가 사용하는 벼루돌인 용연(龍硯)을 달라고 하여 그것을 얻게 되었고, 봉림대군은 “나는 다만 나와 같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온 모든 우리나라 백성들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기만 바랄 뿐입니다”라고 말하자 청나라 황제가 “봉림대군은 큰 일을 할 사람 같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두 왕자가 귀국해 인조를 뵙게 되었을 때 인조가 왕자에게 “청나라에서 얻은 선물이 무엇이냐?”고 봉림대군에게 먼저 묻자, 봉림대군은 말하기를 “저는 다만 저와 함께 볼모로 잡혀갔던 백성들과 돌아오기를 간청하여 같이 왔을 뿐입니다.”라고 말하였고, 소현세자는 아뢰기를 “저는 청나라 황제가 가장 아끼는 용연을 얻어왔습니다.”하면서 벼루를 인조에게 드리니 왕은 하도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고 한참 앉아 소현세자를 내려 보다가 “뭐야! 용연석?”하면서 벼루를 소현세자의 머리를 향해 던져버렸다. 이 때 벼루가 소현세자의 머리에 맞아 그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귀국 후 두 달 만에 소현세자는 사망하고 말았다. 그 후부터 어린 사내아이를 꾸짖는 말로 ‘용연석’하던 것이 점점 변하여 ‘요년석’으로 되었다고 한다.
송백헌 칼럼 | 입력 : 2004-08-23 오후 12:07:00
ⓒ 한국대학신문(http://unn.net)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목록
프린트 스크랩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