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마다 나무줄기마다 녹아 내렸던 이슬이 한 두 방울씩 모이고 심산 깊숙이 겨우내 쌓였던 백설이 훈훈한 인심을 받아 영강을, 낙동강을 이토록 풍요로운 땅으 로 만들지 않았던가, 영욕의 세월이 난세에 영웅과 간신을 배출했지만, 유수의 세월이 물길을 내고 선인들을 불러모아 불멸의 영남유학사상을 잉태시키지않았던 가, 세월의 번잡을 피해서 내 어렸던 시절의 고향을 찾아와 무심코 흐르는 영강을 바라보노라면 잠언(箴言)이라 할까 아니면 교훈(敎訓)이라 할까. 강줄기마다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 슬기로움이 흐른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연약한 것이 가장 강하고 견고한 곳을 찾아 나선다. 그 러나 무엇을 만들기엔 가진 것이 없어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것이 고고한 유수의 세월은 기어코 유려한 반석을 만들어 내고 만다. 참을성이 있어 물 한울 한 방울이 모여서 단단한 돌을 꿰뚫기도 하고 범람하는 홍수는 자신보다 더 넓은 것을 송두리채 삼켜버리기도 한다.

욕심 많은 인간이 물만 같지 못하여 재물을 모으고 영화를 누리기가 끝이 없는가 싶더니, 무소불능의 자리 뒤에 숨겨두었던 재물과 향락이 남가일몽이 아니던가. 높디높은 백화산 준령의 지위를 마다하고 아늑함이 가득한 용소(龍沼)를마다하 고 굳이 낮은 자리, 바다를 찾아 영강을 떠나 낙동강을 벗삼아 기어코 기나긴 여 정을 나서려는가. 잡아도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너에게 여정 속의 아슬함이, 가련함이, 두려움이 같이 하지만, 기어코 먼길을 떠나는 물음을 알 수 없구나.

알렉산더 대왕이 부하와 씨름을 하다가 넘어졌을 때, 대왕은 통곡을 하고 울었다 한다. 지켜본 부하들은 대왕이 승부에 패한 것을 분하게 생각하여 눈물을 흘리는 줄만 알았으나 대왕은 쓰러지는 순간에 죽음을 생각하며, 죽고 난 후에 자기에게 필요한 땅은 지금 쓰러진 한 평 남짓한 넓이만 있으면 된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그 넓은 세계를 정복한 대왕이라 해도, 그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땅은 관의 넓이 밖에 되지 않는다. 이 허무 때문에 그는 통곡한 것이다.

톨스토이는 그의 단편 '인간에겐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속에서 평생 넓은 영지를 소유하고 싶어하던 한 욕심쟁이가 어느 날 뜻밖의 행운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큰 지주로부터 해가 떠서 질 때까지의 자기가 원하는 땅을 표시해 놓기만 하면 전부 그것을 차지할 수 있다는 약속과 함께 해가 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 면 무효가 된다는 약속을 받는다. 그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온종일 걷고 또 걸었다. 한 뼘이라도 더 많은 땅을 얻기 위해서 한 걸음이라도 더 멀리 더 빨 리 걸어야만 했다. 그러나 일몰 직전에 약속장소로 돌아온 그는 숨이 차서 피를 토하고 죽어 버린다. 너무 무리를 한 까닭이다. 결국 그가 필요로 한 땅은 사방여섯자 밖에 안돼는 작은 묘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과연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자문해 볼일이다. 토지를 사두면 누 구나 돈벌이를 할 수 있다는 세속적인 욕망도 결국에 묘터 이상의 땅을 허락하지않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옛날은 그러하지 않았지만 오늘의 우리 현실은 농경을 위한 땅이 아니고 부를 축적하는 땅으로 세태가 바뀌고 있다. 이제 우리 도 옛 조상들의 슬기를 음미해 보면서 밭을 가는 것(農耕)이 곧 마음을 가는 것(心耕)이었던 선조들의 삶을 어떻게 이 현실에 접목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 이 오늘의 과제이다.

오늘도 낙동강 물길을 옆자리 하면서 살아가는 군생들이여! 명예와 권력과 재력을 함께 하고픈 사람이 있거든 장자(壯者)에게 물어 보라. "無己, 無功, 無名"을 가르쳐 성현의 길로 안내할 것이다.

마치 높은 자리 마다하고 낮은 자리 찾아가는 물소리가 우리를 희롱이라도 하듯, 외로운 가운데서도 춤추며, 웃으며, 즐거운 노래를 산과 들은 올린다. 인간을 감 동시킨다.

이 땅의 모든 자연을 깨끗하게 씻어주고 만물을 통하여 흐르게 하니 인(仁)이며, 맑음을 추구하고 탁함을 꺼려서 더러움을 쓸어버리니 의(義)이고, 부드러우나 범하기 어렵고 약하면서도 강함을 능히 이기니 용(勇)이며, 샘물이 강으로 바다로 나아감에 나쁨을 포용해도 흐름이 겸손하니 지(智)를 겸하지 않았는가.

아! 오늘도 쉬지 않고 굽이쳐 흐르는 영강이여. 흐름의 모습이 아직도 쉼이 없이 한결 같지만, 우리의 삶의 모습은 굽이굽이 왜곡되고 변질되어 지쳐 있구나.

그러나 우리의 희망은 비록 낮기는 해도 안정된 바다를 향해 모든 것을 버리고, 남겨두고서 남해로, 태평양으로, 세계로 나아간다. 우리 중생 또한 요람에서 왔다 가 속세에서 얻었던 그 모두를 남겨두고 무덤 아닌 요람으로 영생(永生)하는 길 을 찾아 나서야 하지 않는가. <지홍기/영남대 발전협력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