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주목할 만 한 것은 전북대 김경근 교수가 '대학서열깨기'(개마고원, 1999.9)라는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대학입시평준화론이다. 김 교수는 지구상에서 유례없는 우리의 입시지옥, 대 학교육의 부실화, 학생들의 '탈공부현상', 나아가 출신대학에 따른 전국민의 등급화를 지적하며 이를 한국판 카스트제도라고 혹평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대학이 서열화되어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근본적인 해법으로 '입시혁명' 즉 대학입시의 평준화를 제안한다. 과거 중고등학교의 입시평준화와 같이 대학도 제비뽑기를 하자는 것이다. 대학의 서열화의 유일 한 토대는 신입생들의 수능점수 커트라인이므로 학생의 추첨배정은 일거에 대학의 서열체제를 붕괴시킬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실 대학의 서열화와 그에 따른 출신대학신분의 경화현상은 오히려 대학교육이 보편화되면 서 더욱 심화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왔고 이에 따라 입시경쟁은 거의 무법천지가 되었다. 얼 마 전 서울대에 지원하는 학생들이 자기소개서를 작가에게 50만원을 주고 대필시키는 일이 기승을 부린다는 사회면 톱기사를 보고 이제는 대학서열화의 모순이 극점에 다다랐다는 인 상을 받았다.

나는 이러한 혁명적 주장을 대하면서 마치 자본주의의 독점모순이 극에 달했을 때 이에 대항해 사회주의 혁명으로서 일거에 체제를 변혁한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단순하고 명쾌한 이 해법을 보면서, 그런 안을 내놓기까지 저자의 고심과 치열한 현실인식에 공감을 하면서도 대학인의 한사람으로서 다소 유보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예컨대 저자는 대 학의 서열화가 없어지면 이제 노력여하에 따라 새로운 명문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대다수의 대학들이 교수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교수는 다시 학생을 강도높게 가르치고 하는 선순환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입생을 위에서 배정해주면서 대학들에게는 명문대 가 되도록 노력할 동인이 주어질 수 있을까. 본래 평준화와 명문이라는 개념은 서로 어울리 지 아니한다. 현재의 고등학교에서 서울대 금메달수의 집계로 신흥명문을 정한다고도 하지 만 말이다.

독일이나 프랑스 등에서 일정한 선발시험에 합격한 학생들에게 최종적으로는 추첨의 방법으 로 학교를 배정하는 시스템이 유지되는 것은 모든 대학이 국립이고 또 대학의 수준이 그다 지 큰 편차를 보이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다. 즉 대학교육도 완전한 공교육의 일부가 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대학의 평준화는 합리적인 경쟁체제의 구축이라는 시대의 조 류에 역행하는 면이 있다. 독일의 대학들도 서서히 경쟁기제의 도입에 나서고 있고 전공분 야별로 순위를 매기는 작업도 강화되고 있는 추세다. 대학간의 실효성있는 경쟁체제의 구축 에 있어 신입생 선발권이라는 것은 양보하기 어려운 요소가 아닐까.

그러나 저자도 평준화를 통해 대학의 서열이나 간판이 중요하지 않게 된 후라면 대학의 자 율에 따른 선발도 가능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과거는 무로 돌리고 새롭게 동일선 상에서 경쟁을 시작하자는 것인데 이를 보면서 이번에는 마치 고대의 유태사회에서 채무로 인 한 노예를 50년마다 해방시키는 '희년'(jubilee)이 연상된다. 지난 50년간 이류, 삼류대학으로 기죽어 지냈던 대학들에게도 새로운 시작의 기회를 주자는 것인데.

혁명을 꿈꾸든 희년을 염원하든 이것은 대학의 서열구조를 축으로 한 우리 대학의 또 우리 사회의 모순이 폭발점에 다다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국민의 정부의 대학개혁은 시 급하고 전면적인 것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