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의 어느 밤 자정이 다 될 무렵 한국과학기술원(KAIST) 물리학과 교수 6명이 학과 사무실을 나와 주차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늦게까지 연구에 몰두했던 것일까. 유감 스럽게도 그게 아니었다. BK 21 사업에서 석연치 않게, 부당하게 탈락되었다는 사실을 언론에 알리는 보도자료를 작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BK 21 선정 결과가 발표된 후 한 달간의 내 생활을 되돌아보면 학자로서의 바람직한 생활 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장관을 만나서 따지겠다고 교육부를 찾아가고 행정소송을 하겠다고 변호사들을 만나고 기자들과 통화하고 보도자료를 만드는 등 내 인생과는 전혀 관 계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을 했다.
'어떻게 하면 이 풀리지 않는 문제를 해결 하여 학문적 성과를 이룩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잘 알아듣게 효과적인 강의 를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BK 21 선정 과정의 잘못된 점을 들추어내 고 우리의 정당성을 입증할 수 있을까'에 대한 전략 세우기에만 몰두했다.

BK 21은 세계적인 연구중심 대학원 육성이란 야심적인 기치를 내걸고 선정될 연구그룹에게 파격적인 지원을 약속하여 대학가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 모았다. 사업의 중요성과 큰 규모 를 인식한 교육부는 처음부터 선정과정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강조했고, 많은 교수들이 BK 21이 우리 과학기술계에 투명하고 공정한 평가를 정착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역시 정치적 논리가 그 어느 논리보다 앞서는 우리의 불행한 현실 아래서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역과 지역간에, 대학과 대학 간에, 분야와 분야간에 이해관계가 서로 얽히면서 교수들은 끝없는 논쟁에 휘말리게 됐고, '있는 대학'과 '없는 대학'간에, 국립대와 사립대간에 알력이 생기고 감정의 골이 파이게 되었다.
열심히 준비했으나 탈락한 연구그룹들에서 "이제는 연구 잘하는 교수만을 뽑을 것이 아니고 로비 잘하는 교수도 뽑아야겠다"는 자조적 얘기가 나오는 것은 그냥 웃어넘길일만은 아닌 듯하다.

BK 21 선정결과가 부당하다고 느끼더라도 깨끗이 승복할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는 극 소수의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조용히 있으면 선정된 대학이 우리보다 더 우수하다는 것, 그 결정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므로 투쟁을 해야된다는 의견이 절대다수였다.
목소리를 높일수록 우리의 억울함과 판정의 부당성을 사람들이 인정해 준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쩌다가 교수들까지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회가 되었을까. 근본적으로 너무 부당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억울한 일들을 많이 당해서 한 맺힌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교육부 장관이나 심사위원이나 대학총장이나 교수 어느 개인의 잘못이 아니고 지금 우리 사회 의 총체적 혼란과 부정이 빚어놓은 결과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새 천년을 맞는 시점에 있다. 이 중요한 시점에서 우리나라의 모든 과학자, 공학자들의 꿈은 우리 과학기술을 세계일류 수준으로 도약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에의 대폭적인 지원을 선언한 BK 21과 같은 사업이 앞으로도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앞으로는 이런 사업의 운용을 좀더 슬기롭고 공정하게 해서 대학가에 투쟁과 알력과 상처를 주는 대신 평화롭고 안정되고 풍요로운 연구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와 동시에 대학의 구성원들도 자기자신과 자신의 학과, 대학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틀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정당당하 고 건설적인 경쟁과 정치적 배려가 배제된 투명한 심사가 선행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상대 방이 투쟁의 대상이 아니고 공동연구를 하는 협조의 대상이 되는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할것이다.

대학교수들과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연구비를 따오기 위해, 또는 구조조정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을 계속해야 되는 상황에서는 과학기술의 큰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이들이 아무 걱정 없이, 투쟁할 필요도 없이, 마음껏 연구와 강의에 몰두할 수 있는 날이 바로 한국의 과 학기술이 세계 일류 수준에 도달하는 날이 될 것이다.
언젠가는 KAIST 물리학과 교 수들뿐 아니라 전국의 교수, 연구원들 모두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연구에 몰두하다 늦은 밤 주차장으로 걸어 나오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이해웅 교수(한국과학기술원 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