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기에는 세계의 모든 사회가 지식 중심의 사회로 변화될 것이라 예견되고 있다. 국가의 경쟁력이 과거의 경우처럼 전쟁 수행 능력이나 상품의 생산력에 의 존한다기 보다는 첨단 지식의 창출과 그 활용 능력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마이 크로소프트사가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던 그 기반이 독창적인 기술력에 근거한다 는 것을 단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정보통신기술의 혁명적 발전으로 인해 새로운 지식을 창안한 국가나 개 인이 세계를 향해 자신의 영향력을 보다 빠르게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지식은 그것이 고안된 즉시 세계적 차원의 시장을 소 유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국가·인종·지역·언어와 같은 전통적인 경 계를 넘어선 지식 경쟁의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 비추어 볼 때 대학의 존재 가치와 역할이 종래와는 다른 측면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도 인지하는 사실이다. 실은 우리의 대학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여러 측면,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많은 분야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매우 힘든 역할을 감당해 온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지 난 50년 이상 한국 사회가 대학에 그러한 역할을 요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다가오는 새로운 2000년대에는 우리가 대학에 부여해야할 새로운 역할 이 있을 것이다. 즉 변화된 질서와 시대환경을 개척해야 하는 선두주자 또는 군 대의 용어로 척후병의 역할을 담당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견해를 전제로 한다면 현재 우리 대학은 그러한 사회적 위상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지는 못한 실정이다. 한국 대학의 경쟁력은 대단히 낙후되어 있다는 것이 이제 하나의 상식에 속한다. 이것은 국가의 대학교육에 대한 정책의 혼선과 부재, 대학 당국이 변화에 적응하는 자세가 나태하고 안일하다는 점, 교수들의 불 성실과 근시안적 권위의식의 총체적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로 보인다. 결국 한국의 대학은 무엇인가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해야할 지점에 서 있는 것이다.

대학의 변화는 무엇보다도 대학이 새로운 지식생산의 거점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대학에 소속된 연구자 개개인이 연구능력의 함양과 제도적 기반의 확충, 국가 정책방향의 올바른 수립과 일관된 정책 기조의 유지, 생산된 연구결과의 활용과 그 결과의 신속한 사회확산 등 여 러 방면에 대한 노력이 체계적으로 결합되어야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대단히 치밀한 준비와 장기간의 노력을 통해야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같이 짧은 글 속에 그 전모를 적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다만 제언의 차원에서 몇몇 중요한 점들을 거론하고자 한다.

대학을 새로운 지식생산의 중심으로 새우기 위해서는 첫째, 국가의 학문 정책에 대한 표준설계가 제시되어야 한다. 학문은 그 성격상 일종의 "무정부성"을 갖기 쉽다.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쉽게 통제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국가가 장기적인 학문정책을 수립하여 각 분야간 특수성을 고려한 발전지표를 설정해야 한다. 이러한 지표에 근거해 연구인력의 육성과 연구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 야만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지식의 확보가 가능할 것이다. 교육부에서 추진한 "두 뇌한국(BK)21사업"은 그런 점에서 향후 지식 수요를 대비하기 위한 국가정책의 중요한 사례라 할 것이다.

우리의 교육과 대학이 그동안 그 역할에 비추어 그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이유도 장기적이고 고정적인 대학육성정책의 부재에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우 선은 교육부의 확고한 육성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정말로 백년 대계라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어야 한다.

둘째, 대학사회 내부에서 연구력 증진을 위한 경쟁체제가 완전히 보장되어야 한 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교원의 신분 및 성격과 대학내의 학문생산주체의 다양 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연구교수와 강의교수로 교육과 연구의 영역을 분리하거나 대학부설연구소의 위상과 규모를 강화하여 통합적이면서도 능동적인 연구프로젝트를 수행케 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연구력이 우수한 교원들과 대학원생들에 대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또 여기에는 상당한 투자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당장 올해만 해도 정부의 연구 개발예산(R&D) 이 약 2조원에 육박하지만 아직도 저변에는 투자에 걸맞는 결과 가 생산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이 이를 반증해 주고 있 다. 우선은 연구자 자신과 이를 지원하는 당국의 문화 퐁토가 바뀌어야 할 것이 다. 지원은 연구의 수준을 현실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수준이여야 하고 연구 자는 이를 자신의 소득이 아니고 사회에 환원시킬 자산이라는 감각을 갖는 것이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셋째, 대학의 학술진흥을 담당하는 국가기관의 위상과 역할을 보다 강화해야 한 다. 미국의 NSF와 같이 학문의 수요와 방향을 예측하고 국가가 지원해야할 학문분야와 연구주제를 설계할 수 있는 전문기관을 통해 연구자들의 연구의욕을 고취하고 재정적인 뒷받침을 충분히 제공하는 일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한 국학술진흥재단이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나 아직 기금의 규모나 지원방식, 사후관리에 있어서 한국의 학술연구 진로를 선도할 만큼 체제가 완비되지는 못한실정이다.

이는 한국학술진흥재단 또는 그와 유사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연구비 지원 기 관들의 자세와 의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학술연구는 수요자가 예측 가능해야 하나 우리 정부나 연구비 지원기관은 수요자에 대한 봉사정신이 아직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철저하게 서비스업이라는 업무 자세로 거듭나야할 필요가 있다. 이상에서 추상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의 학술연구는 정책입안자, 연구자, 연구 지원자가 모두 반성해야할 요소를 보유하고 있다. 이런 책임들을 누구에게 떠넘겨도 안 될 것이며 절실하게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해야만 새로운 시대에 부 합되는 멋있는 연구가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 마음만 합쳐지면 전 세계에 두려울 것이 없는 한민족 아닌가. <우제창/한국학술진흥재단 정책기획실장>